29.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동유럽 6국 8박9일, 2011.04.21 ~ 04.29)
East Europe (동유럽)
(2011.04.21 ~ 2011.04.29)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6개국 9일)
폴란드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2011.04.26)
폴란드 옛 수도인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70km 거리에 세계 제2차 대전때 독일이 세운 폴란드어 오슈비엥침(독일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이곳은 폴란드 남부의 작은 도시로 수용소 시설을 위장할 수 있는 시골의 작은 도시이다. 여기를 이런 시설을 만든 것은 누가 보아도 평화로운 시골 도시에 이런 현장을 숨겨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하게 하기 위함이고 유럽의 각 도시에서 거리라던지 이곳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교통편이 좋았다 한다.
원래는 폴란드군 병영이었으며 1940년 봄 이 곳은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가 있는 수용소가 만들어지며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로 시작되었다.
외부에는 평화롭게 보이나 생지옥의 수용소 안에는 학살한 시체를 태우는 소각로,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 열차에 실려온 사람들을 구분하여 일을 할 수 없는 노인과 어린이 또 일을 할 수 없는 정도의 쇠약자는 곧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 되었다.
고문, 총살, 굶주림, 생체실험 등으로 약 4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되는 비극의 현장이다.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자 기사에는 110만 ~ 150만명이라 추정했다. 이 중에 2/3가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라 불리고 있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깎아 카펫을 짜고, 뼈는 갈아 골분비료로 썼다고 하니 ..... 제2차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나치는 이 곳을 은폐하고자 불태우며 파괴를 하기 시작 했으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여 시설의 일부가 남았다.
1947년 폴란드 의회가 이 시설을 보존하기로 결정하였고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세우고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스비츠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곳에는 수용소가 제1수용소, 제2수용소, 제3수용소가 있는데 우리는 제1, 제2 수용소를 가 보았다. 이 수용소에서 자행된 생체실험등 자료는 현재 살고 있는 세대가 그 덕을 보며 살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볼수 있다.
일본도 세계 제2차대전 중 731부대에서 조선인, 중국인, 몽골인 등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부대의 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은 그 자료를 모두 미군에 넘기는 조건으로 면책이 되어 일본녹십자관련 활동, 도쿄올림픽 조직위 위원장 등을 지내며 67세에 암으로 죽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화가가 되려고 하였으나 입학시험에 떨어져 진학하지 못했고 돈이 없어 고생하던 젊은 시절 돈많은 유태인에게 돈을 빌려써야 하는 형편이었을때 그들로부터 멸시를 받아 분노의 불길이 가슴속에 자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을 학살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유태인들도 깨우쳐야 할 점이 있을 것으로 본다. 소설 '베니스의 상인'이 잘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왜 유태인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태인 학살만 부각시켜 그 이유를 묻어 버리면 다시 유태인에게 나치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런일이 또다시 발생될지도 모르지 않겠나 생각된다.
독일은 종전후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었으며 서독은 패전국으로 나치의 책임을 통감하며 전쟁피해보상등 다른나라에 대해 보상을 하며 나치에 협력자는 공직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으며 동독은 승전국으로 행세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자들 중 일본인은 적다고 안내자가 전하였다. 세계 제2차대전의 일본측의 모든 사건을 승인한 히로히토(裕仁) 일본국왕은 사형을 시켜도 모자라는데 계속 일본의 국왕지위를 유지하며 살았으니 독일민족과 일본 또 미국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폴란드 오슈비엥침(폴란드어) 기차역 표지 (영어 아우슈비츠)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지도로 1, 2, 3 수용소가 표시되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유럽 각도시를 표시한 지도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럽 지도)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문구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그 역사를 다시 반복하게 될 수도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건물로 28동이 있다 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건물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헤드폰을 빌려주고 있다.
각 안내자마다 마이크를 들고 설명을 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헤드폰을 쓰고 있는 우리 일행들
우리 일행 중에는 제주도에서 온 초등학생도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정문 그림
정문에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정문
정문에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적막하기만 하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탈출하다 체포되면 사람을 죽여 수용자들이 볼 수 있게 이곳에 매달았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내 감시초소와 울타리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이중 철조망 울타리 고압전류가 흘렀다. 감시 초소도 보인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이중 철조망 울타리로 고압전류가 흘렀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수용소 소장(SS 중령)이었던 루돌프 회스(Rudolf Franz Ferdinand Hoess)
단 한사람을 처형하기 위해 가스실 옆에 만들어진 교수대
아우슈비츠수용소 아돌프 회스 소장은 전쟁 후 숨어 있다가
연합군이 아내와 4자녀를 구금하고 아내에게 4자녀를 시베리아로 보내겠다고 협박하자
부인이 위치를 알려 주어 체포되었고 폴란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안내문구 내용]
이 곳은 게슈타포 캠프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수용소 지하의 저항 운동이나 탈출을 꾀한 것으로 의심되어지는 수용자들은 여기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많은 수용자들응 구타 또는 고문을 받음으로서 죽어 갔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첫 번째 소장이자 SS 중령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폴란드 최고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47년 4월 16일 여기서 목을 매달아 교수형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