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강화도 (인천 강화군. 2007.11.03)
강화 초지진, 마니산
인천 강화군
(2007.11.03)
초지진(草芝津)
사적 제225호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다.
고종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 극동함대,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 3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을 공략하였다.
1875년 8월 21일 일본군함 운양호가 초지진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병자수호조규의 시효진이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 있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아
사학자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강화군 문예관광 홈페이지 참조]
병인양요
선교사의 역활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선교사는 포교를 목적으로 한다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역으로 이용하는
권력자들이 뒤에서 그들을 비호하고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약소국 침략을 정당화 시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고종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 극동함대,
이 병인양요 침입사건으로 우리의 보물인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갔다.
그런데 우리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서적 등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 당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다.
약탈 당한지 120여년이란 세월이 지난후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약탈해간 외규장각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며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한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강화 초지진 성곽
강화 초지진 성곽 소나무와 포탄흔적
강화 초지진 성곽내 진열되어 있는 당시 대포
강화 초지진 성 안에서 성벽 창(구멍)을 토해 바라보는 바닷가
(이 구멍을 통하여 적군과 대치하고 목숨을 건 전쟁을 하였겠지요)
강화 초지진 성
강화 초지진 성 건물안에는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강화 마니산
강화 마니산 첨성단을 배경으로
강화 마니산
강화 해지는 모습 (우리가 1박한 팬션에서)
강화 해가 반쯤 물속에 (우리가 1박한 팬션에서)